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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12

하룬 야히아 - 『새와 나』 새와 나 나는 언제나 궁금했다 세상 어느 곳으로도 날아갈 수 있으면서 새는 왜 항상 한곳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그러다가 문득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 2022. 6. 16.
먼 훗날 묘비명 먼 훗날 묘비명 나는 이곳에 누워 바다의 소리를 듣습니다 육신에 붙어있던 험상궂은 미움들은 돌담 아래 숨어버리고 홍조 띤 사랑이 들어찹니다 나는 새벽에 일어나 당신이 남긴 쪽지를 펼쳐봅니다 색은 다양합니다 어느 하나 같지 않지만 모든 색이 사랑스럽습니다 석양이 질때면 당신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춤을 춥니다 기쁨이 악보에 채워지고 노여움이 잠시간의 정적을 가져다 줄지라도 그 모두 선율이라는 단어에 담겨 정겹게 곡을 이룹니다 당신이 나를 추억할 때, 나도 당신을 추억하며 나는 오늘도 이곳에 누워 바다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2022. 6. 7.
김사빈 - 『홀로서기』 홀로서기 말릴 사람도 없으니 오랜만에 술을 진탕 마셨다 뭐하나 할 줄 모른다는 무기력이 자랑인 양 마시고 또 마셔대었다 세평짜리 단칸방이 빙빙 돌았다 분명 나는 죽은듯 가만히 누웠는데 세상은 자꾸만 주변을 내달렸다 그리고 그조차도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 사는 행성의 자전마저 저 혼자 달리는 것이었음을 알았기에 무엇 하나 없는 오늘밤에도 누구도 알지 못하는 찰나의 불티조차도, 홀로 불꺼진 우주를 그토록 힘차게 내달리고 있었음을 알아버렸기에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은 별볼일 없을만큼 가벼웠고, 그보다 더 조그마한 나는 책임이란 단어조차 두려웠었다 좁디 좁은 서울의 단칸방 겨우 한 조각의 정적을 맛본 나의 젊음은 기어이 어린 티를 한껏 뒤집어 쓰고 아이처럼 울었다 2022. 5. 26.
함동수 - 『지는 꽃』 지는 꽃 꽃이 피는가 돌담 곁에 장미 한 송이 탐스럽게 피는가 수고했다 꽃 한송이 피는 동안 얼마나 많은 수고로움이 있었느냐 얼마나 많은 바람과 햇빛이 쓰다듬었느냐 찬란한 꽃 한 송이 그것만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뜻 충분했다 국화 향 퍼지는 저물녘 꽃 한 송이 허물어지는가 수고했다 수고했다 그간 수고했다 꽃 지고 나니 향기 자욱하구나 2022. 4. 12.
의미없는 문자의 나열 의미없는 문자의 나열 떠오르는 태양 부서지는 거리 눈금없는 저울 꺼억대는 자판 이름모를 노을 울고있는 아이 달을토한 하늘 말못하는 광대 들여다본 거울 퇴적하는 사내 퇴적하는 사내 퇴적하는 사내 2021. 11. 5.
최승호 - 『눈사람 자살 사건』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 2021. 10. 29.
김종삼 - 『민간인』 민간인 1947년 봄 심야(深夜)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바다 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 ​ 사공은 조심 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2021. 8. 10.
복효근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몰래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 ​ ​ 아름다운 번뇌 ​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2021. 8. 7.
서정주 - 『문둥이』 문둥이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2021.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