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詩

최승호 - 『눈사람 자살 사건』

by 철제백조 2021. 10. 29.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시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함동수 - 『지는 꽃』  (0) 2022.04.12
의미없는 문자의 나열  (0) 2021.11.05
김종삼 - 『민간인』  (0) 2021.08.10
복효근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0) 2021.08.07
서정주 - 『문둥이』  (0) 2021.08.06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