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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

복효근 -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by 철제백조 2021. 8. 7.

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 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 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 떼가

누우들이 몰래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 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 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번뇌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강은 가뭄으로 깊어진다

가뭄이 계속되고

뛰놀던 물고기와 물새가 떠나버리자

강은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처음으로 자신의 바닥을 보았다

한때

넘실대던 홍수의 물 높이가 저의 깊이인 줄 알았으나

그 물고기와 물새를 제가 기르는 줄 알았으나

그들의 춤과 노래가 저의 깊이를 지켜왔었구나 ​

강은 자갈밭을 울며 간다

기슭 어딘가에 물새알 하나 남아있을지

바위틈 마르지 않은 수초 사이에 치어 몇 마리는 남아있을지...

야윈 몸을 뒤틀어 가슴 바닥을 파기 시작했다 강은

제 깊이가 파고 들어간 바닥의 아래쪽에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가문 강에

물길 하나 바다로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대나무의 고백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컨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 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 있는 것이다

물총새의 사냥법

내가 누군가의 마음 한 조각을 훔치기 위해

갖은 계략을 짜고 있을 동안

새는 그저 잠시

물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지

내가 한 사람 마음의 황금빛 중심에 다가가기 위해

굴절각을 재고 입구와 출구를 찾고 있을 동안

새는 그때 이미

한 알의 총알이 되어 물속으로 내리꽂혔던 거야

내가 누군가의 마음에 머물러 둥지를 틀 것을 꿈꾸며

손익계산으로 날개가 퇴화되어가고 있을 때

새는 춤추듯 파닥이는 은빛 물고기 입에 물고

물을 박차며 하늘 높이 날아갔지

물총새 다녀간 자리

물속에도 물낯에도 흠집 하나 남기지 않네

가끔은 새의 사냥이 빗나갈지라도

물총새 무심히

무심히 날아오르는 빈 날갯짓이 더 아름답다네

겨울나무

꽃눈은 꽃의 자세로

잎눈은 잎의 자세로 손을 모으고

칼바람 추위 속에

온전히 저를 들이밀고 서 있네

나무는,

잠들면 안 된다고

눈감으면 죽는다고

바람이 둘러주는 회초리를 맞으며

낮게 읊조리네

두타頭陀*의 수도승이었을까

얼음 맺힌 눈마다 별을 담고서

나무는

높고 또

맑게

더 서늘하게는 눈뜨고 있네

* 두타(頭陀) : 산야를 떠돌면서 빌어먹고 노숙하며 온갖 쓰라림과 괴로움을 무릅쓰고 불도를 닦음, 또는 그런 수행을 하는 중을 뜻한다

만복사저포기

- 양생의 말

그것이 사랑이라면

어찌

이승의 것만이 사랑이겠느냐

그것이 인연이라면

단 한 번의 저포놀이라 할지라도

숙세宿世 내세來世 건너가는 다리가 아니겠느냐

옷깃 스친 꽃잎 하나로도

영원이 아니겠느냐

그 단내 나는 숨결

한 바탕 꽃꿈이라 하지만

그것이 운명이라면

사랑해서는 안 되는 것까지도

사랑하는 나의 길은

이승 저승 영원의 길

혹시 네가 다시 그 길에 피어

옷깃에 스칠 수만 있다면

내가 오늘 지리산에 들어

시방세계 꽃잎을 다 헤겠다

아기 돌탑

산길을 가다보면 굽이굽이

작고 못생긴 돌 조각으로 쌓은 탑 있네

누가 쌓았을까

산처럼 커야 한다고

백장암 삼층탑*처럼 높아야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돌패랭이 같은

용담꽃 같은

온 천지 들꽃 같은

애기 돌탑

위에

아래

그것은

돌이

아니라네 탑이라네

산길 가다보니 돌멩이 하나 하나가

두고 온 그대

떠나간 내 모든 그대 얼굴이네

어느덧

지리산도

소슬한 한 채 탑으로 서 있네

쑥부쟁이 연가

그 가시내와 내가

그림자 서너 배쯤 거리를 두고

하굣길 가다보면

마을 어귀

쑥부쟁이 너울로 핀 산그늘에

가시내는 책보를 풀어놓고 아예

가을 다 가도록

꽃이 몇 송인지 한참이나 꺾다간

뒤도 안 돌아보고 가곤 했었지

저만치 뒤에 쪼그리고 앉아

가시내 스치는 손끝에 내 마음도 피어서

꺾이는 저 쑥부쟁이 꽃빛깔

꽃빛깔로 달아오르곤 했었지

세월도 그 가시내

무심한 눈길 몇 번 마냥 흘러서

마을 어귀 지날 때

시방은 누가 거기 홀로 피어 울고 있는지

쑥부쟁이,

쑥부쟁이 너울로 핀

산그늘에

콩나물에 대한 예의

콩나물을 다듬는답시고

아무래도 나는 뿌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무슨 알량한 휴머니즘이냐고

누가 핀잔한대도

콩나물도 근본은 있어야지 않느냐

그 위를 향한 발돋움의 흔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하지는 못하겠다

아무래도 나는

콩나물 대가리를 자르진 못하겠다

죄 없는 콩알들을 어둠 속에 가두고

물 먹인 죄도 죄려니와

너와 나 감당 못할

결핍과 슬픔과 욕망으로 부풀은 대가리 쥐어뜯으며

캄캄하게 울어본 날들이 있잖느냐

무슨 넝마 같은 낭만이냐 하겠지만

넝마에게도 예의는 차리겠다

그래, 나는 콩나물에게

해탈을 돕는 마음으로

겨우 콩나물의 모자나 벗겨주는 것이다

낙엽 밟았다는 사건

밟히는 순간 아득히

부서지는 낙엽들의 소리

내가 걸음을 갑자기 멈춘 것은,

오후 약속을 잊은 것은 그 소리 탓이었다

그녀는 기다리다 떠나갔고

나는 언덕에서 네 시 기차가 떠나는 소리를 듣는다

- 한 생生이 낙엽 부서지는 소리로 바뀔 수 있다니

또 발밑에선 낙엽이 부서지고

먼 곳에선 새가 난다

누군가 또 약속을 잊고

누군가 또 기차를 바꿔 타나보다

낙엽 소리에

먼 하늘 별이 돋는다

복숭아꽃 아래서

부풀은 처녀의 젖꽃판 같은

복숭아 꽃잎을 따서

갓 우려낸 작설 찻물에다 띄워놓고

한 손으론 잔을 받치고

지그시 기울이면

무릉이 어디 따로 있겠는가

도색桃色도 이쯤이면 속되지는 않아서

이렇게 복사꽃 붉은 날엔

애먼 그리움 하난 있어도 좋겠다

차마 꽃잎을 따지는 못하고

눈으로만

벌써 녹빛이 물들도록 차를 마시는데

그것을 알고 복숭아

저도 뜨거워지는지 꽃잎을

그 젖꽃판 같은 꽃잎을 뿌려주네

소금의 노래

바다는 뉘를 그려

제 몸에 사리를 키웠는지

곰소 염전에 쌓인 소금더미 보겠네

그대,

소금의 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푹푹 빠지는 갯벌이거나

난바다 바닷물 속

뒹굴고 나자빠지면서 부서지고

아우성치던 흐느낌도 잦아들어

내 것 아닌 것 바람에 돌려주고

햇살에 돌려주고 끝끝내

더 내어줄 수 없을 때까지 내어주고

비로소 부르는 순백의 소금노래를

그대 듣는가

에라 모르겠다 다 가져가라 내던지고

돌아서는 가슴에서

묵주알 구르는 소리 같은 것

눈물이 사리가 되어 내는

그 고요한 소리의 반짝임 같은 것

연어가 돌아가셨네

섬진강에 연어가 돌아가셨다네

얕은 여울 자갈 틈새에

알을 낳고는 연어는 곧 죽어버린다네

연어가 돌아왔다고

인간의 입장에서가 아니고

나는 연어의 입장에서 말하기로 하네

연어의 잔뼈를 키운 저 북태평양의 거친 물결과

베링해의 푸른 바람의 입장에서 말하기로 하네

캄차카반도와 알래스카를 휘돌아

연어는 죽기 위해

오직 죽기 위해

강에 돌아간다네 돌아가 죽는다네

서서히 제 살점을 물에 풀어놓는다네 죽은 연어가

몇 점 떼어준 그것은 숭어에게로 돌아가네

피리에게 모래무지에게

강변의 버드나무 뿌리에게 수달에게 물까마귀에게

무엇보다 금방 태어날 제 새끼들에게 돌아간다네

그 미래의 시간에게 저를 되돌려주네

4만6천 킬로 먼 길 달려가

애초 있던 그 자리로 저를 돌려주어 버리네

탯자리에서 몇 킬로도 벗어나지 않아

돌아갈 길 잃어버린 내 미망이 부끄러웠네

나는 연어가 돌아가셨다고 말하기로 하네

숲, 혹은 사랑에 관한 변주 4

- 꽃이 피는 까닭

풀잎이라 하여 나무라 하여

어찌 살냄새가 그립지 않겠는가

바람이 불면

함께 흔들리며 춤추는 숲의 흘레

몸이 곧 언어인 숲의 시민들

그리우면 그립다 말하여

서로를 상해버리는 언어를 버리고

그리우면 다만

숲의 나라 시민들은 입에 꽃 한 송이 피워 문다

물음표(?)는 살아 있다

 

백로가 강여울에

그리움처럼 먼 데를 바라볼 때 슬픈 짐승의 모습이다가도

가끔 물속을 들여다볼 때는

구부린 모가지가 물음표 같다

사색하고 있다고

제 모습을 물낯에 비춰보는 거라고 누군가

시적으로 말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말하자

물속의 제 먹이를 찾느라 목이 휜 것이다

왜 당신의 허리는 물음표를 닮았느냐고

굽은 허리로 힘겹게 육교를 오르는 할머니께 물어보라

그리움이라든가 사색

낭만 어쩌고 시가 어떻고 했다가는

빰 맞기 십상이다

먹이 앞에서는 사람도 백로도 일단 숙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때가 살아 있을 때다

물음표(?)가 느낌표(!)로 쭉 뻗으면 관 속에 누울 시간,

먹이를 더 찾을 필요도 없는 순간이다

사람과 백로가 닮은 점이 그것이다

꿈꾸는 목련나무

저녁이 되자 아이는 타고 놀던 자전거를

아파트 앞 목련나무에 긴 줄 자물쇠로 매어놓는다

사람들이 잠은 자는 동안

나무는 아이 대신 자전거를 타고 논다

나무만이 아는 자전거 타는 법이 있어

아무도 모른다

실은 나무가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아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긴 하다

나무가 사람에게 자전거 타는 것 보았다고 말한 적 있던가

춤추듯 출렁이는 목련가지의 율동을 온 몸에 받으며

목련나무를 태운 자전거는 즐거웠을 것이다

새 잎이 또 나고 꽃몽오리까지 맺힌 것을 보면 밤새

사랑까지를 다 익히고 돌아왔을 터인데

어디까지 다녀왔는지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누가 자전거를 훔쳐갈까봐

자전거를 나무에 매어놓은 거라고 말하진 말자 그것은

목련나무를 누가 뽑아갈까봐 자전거에

목련을 매어놓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이가 목련나무와 말뚝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할 텐가

고단한지 서로 기대고 아침 늦게까지 자는 놈들에게

깨워서 묻는 일이란 없어야겠다

그러면 목련나무가 깨어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꿈이 필요해

그러나 목련은 아무 말 하지 않을 것이다

즉시 자전거를 탈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과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

땅 속 깊은 데서

실뿌리가 길어올린 순수純水와

잎잎이 받아들인

달과 해와 별빛이

여기 고였으니

사과나무 하나가 받쳐들고 서 있는

이 사과 한 알이 우주가 아니겠는가

나에게 묻는다

사과 한 알 빚어본 적 있는가 누구에게

발가벗은 온 우주로 다가가본 적 있는가

산길

산정에서 보면

더 너른 세상이 보일 거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산이 보여주는 것은 산

산 너머엔 또 산이 있다는 것이다

절정을 넘어서면

다시 넘어야 할 저 연봉들...

함부로 희망을 말하지 마라

허덕이며 넘어야 할

산이 있어

살아야 할 까닭이 우리에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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